안녕하세요, 여러분. 유니버설뮤직입니다.
한 달 전엔 '30년 전 4월 5일, 세상을 떠난 커트 코베인' 관련 글을 실었는데요. 오늘은 그 후속편을 보내드리고자 합니다.
그러면 이번 주 유니버설뮤직 소식 함께 보실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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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이유식은 아래 순서로 작성하였어요.
1. 인디란?
2. 너바나 결성과 록스타의 정체성
3. 소년, 세상을 등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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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 중에서 한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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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M. - Losing My Religion (Live from Glastonbury Festival, 19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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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디란?
그렇다면 당시 너바나가 붐을 불러왔던 인디 록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먼저 인디라는 단어를 정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평론가는 인디란 거대 자본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신들이 원하는 음악을 하고자 하는 뮤지션, 혹은 레이블을 뜻한다고 합니다. 그럼 그 자본의 규모가 몇 억 이상 돼야 하냐고 물을 수 있죠. 이에 한가지 기준점으로 삼을 수 있는 게 있습니다. 영국의 주요 인디 레이블이 모여있는 인디 뮤직 협회 ‘AIM(Association of Independent Music)’는 만약 메이저의 지분이 50% 이상일 경우 인디가 아닌 것으로 봅니다. 이 수치는 창작물에 대한 주도권이 보장될 수 있는지를 판가름하기 위한 상징성과도 같죠.
미국에서는 1978년 이후, 인디 록이 도시에서 퍼지기 시작합니다. 인디 록이 유행했던 지역엔 대학생과 그들이 운영하는 라디오 방송국 역할이 컸습니다. 특히 워싱턴의 시애틀이 그 대표 주자였습니다. 밴드들은 반상업적인 펑크 록의 DIY 감성과 헤비메탈의 두터운 사운드의 질감을 결합한 기타 중심의 음악을 들려주었습니다. 지역 내 클럽을 전전하며 연주를 하고, 근근이 운영하는 영세 인디 레이블에서 음반을 내곤 했습니다. 이들은 메인 스트림에 올라가지 않아도 충성스러운 공동체 팬 덕분에 일종의 록스타 행세와 돈벌이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 대형 음반사가 이 기조를 파악하죠. 그들은 항상 차세대 대박 상품을 찾고 있었고, 독립 레이블 작품을 배급 및 홍보합니다. 그러면서 몇몇 밴드가 국제적 성공을 거두기 시작합니다. 너바나도 그중 하나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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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ew'는 너바나 정규 1집의 첫 번째 수록곡입니다.
“커트는 록스타가 되려고 모든 음반사에 편지를 뿌려 댔어요.” – 코트니 러브(Courtney Love)
1985년, 커트 코베인은 멜빈스 합주실 밖에서 서성거리던 중 훗날 너바나의 베이시스트가 되는 크리스 노보셀릭(Kris Novasalic)을 만납니다. 둘 다 펑크를 좋아했던 지라 금방 친해질 수 있었고, 연습도 같이하죠. 몇 년 후 커트 코베인은 크리스에게 페컬 메터(Fecal Matter, 커트 코베인이 잠시 몸담았던 그룹. 한국말로 하면 '똥')의 데모 음반을 주면서 밴드 결성을 제안합니다. 첫 이름은 스티프 우디스(Stiff Woodies)였죠. 하지만 큰 관심을 얻지 못했습니다. 두 멤버는 고심 끝에 드러머 채드 채닝(Chad Channing)을 영입하고, 1987년 밴드 이름을 너바나로 바꿉니다.
너바나는 지역 대학과 클럽에서 컬트적 인기를 몰기 시작했습니다. 사운드가든(Soundgarden)의 묵직함과 픽시스(Pixies)의 멜로딕한 펑크 사운드를 섞은 음악에 많은 팬이 생겨난 것이죠. 이후 밴드는 시애틀의 유명 인디 레이블 서브 팝(Sub Pop)과 계약을 맺고, 1989년 1집 <Bleach>를 세상에 내놓습니다. 첫 앨범에는 고작 600달러(이는 메이저 레코딩 스튜디오에서 30분 정도를 녹음할 수 있는 수준의 적은 돈)가 들어갔습니다. 이 작품은 3만 5천 장 이상 팔리면서 꽤 성공을 거둡니다. 당시 커트 코베인은 연습에 매진하며(공연 중엔 금연도 했다) 록스타의 삶을 원했는데, 그 고점이 보이는 듯했습니다. 다음은 서브 팝에서 낸 보도 자료입니다.
“너바나는 언더그라운드 신이 정체됐으며 제도권 음악의 자본주의 돼지인 메이저 음반 레이블처럼 돼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너바나가 이러한 암적인 악과 싸울 도덕적 책임감을 느끼는가? 전혀! 우리는 현찰을 원하며, 큰 가발을 뒤집어쓴 채 취하고 놀기를 원할 뿐이다. 곧 우리에게도 그루피들이 필요할 것이다”
너바나는 더 큰 인기를 원했습니다. 1990년 커트 코베인은 연주가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채드 채닝을 해고하고 데이브 그롤(Dave Grorl)을 영입합니다. 이후 미전역 및 전 세계에 음반 배급망을 갖춘 메이저 레이블을 찾던 도중, 이듬해 미디어 거물 데이비드 게펜(David Geffen) 소유의 DGC와 28만 7,000달러에 계약을 맺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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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rvana - Smells Like Teen Spirit (Official Music Video)
대규모 자본과 계약이라. 너바나는 이제 인디 밴드로서 정체성에 혼란을 겪어야 할 때가 온 것이죠. 당시 2집 [Nevermind]의 프로듀서는 밴드의 사운드를 완전히 깔끔하게 다듬습니다(1집과 비교하면 명확합니다). 차트 진입을 위해서였죠. 커트 코베인은 경악했지만, 유명세를 위해 감내했습니다.
바라던 대로 앨범은 대성공을 거둡니다. 첫 물량 5만 장이 즉시 동났죠. 1992년 ‘Dangerous’를 끌어내리고 1위 자리에 올랐으며, 무려 5년 동안이나 차트에 머물며 1,000만 장이 넘게 나갑니다. 이제 밴드는 레이블과 계약에 따라 전 세계 투어를 돌아야 했습니다.
커트 코베인은 갑작스레 찾아온 성공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고 합니다. 언더그라운드 정체성에 혼란을 느꼈고, 자기 팬이 되려는 사람들에게도 적대감을 느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특히 자신의 불우한 과거사를 세대의 드라마로 삼은 미디어와 대중에 혐오감을 느꼈죠. 자신을 괴롭혔던 악마를 다시 소환한 격이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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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소년, 세상을 등지다.
“타오르는 것 같은 이 지랄맞은 위장으로부터 모두에게 감사를 전한다” – 커트 코베인의 유서 중
그는 위안을 위해 헤로인과 손을 잡았습니다. 걷잡을 수 없이 중독은 심해졌습니다. 그래도 92년 2월 코트니 러브와 결혼했을 때는 희망이 보이는 듯했습니다. 마침내 자신을 이해해 주는 사람을 만난 듯했죠. 하지만 둘 다 헤로인 중독에 빠지고 맙니다.
1994년, 커트 코베인은 샴페인과 마취제(50알)를 과다 복용한 후 20여 시간의 혼수상태에 빠졌습니다다(코트니 러브는 그의 첫 자살 시도였다고 말합니다). 코베인은 배에 그 병명을 특정할 수 없는 어떤 격심한 통증을 달고 살았는데, 고통으로 벗어나기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그는 멤버들의 설득 끝에 재활원으로 가지만, 이내 탈출하고 맙니다. 자살의 충동은 이길 수 없었다. 마치 먼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두 삼촌이 손짓하는 듯했죠. 4월 5일, 커트 코베인은 총기와 헤로인을 사고 그린 하우스로 돌아옵니다. 맥주와 헤로인에 점점 시야가 흐려졌습니다. 한가지 생각은 분명했습니다. 사라지고 싶다. 그는 총을 집어 들고 방아쇠를 당깁니다. 운명의 장난이 한 남자를 집어삼켰고, 영원한 정적만이 흘렀습니다.
“XX 자식…그래, 커트, 그래서 뭐? 록스타 따위는 되지 말라고” – 코트니 러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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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rvana - Come As You Are (Official Music Vide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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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곡은 너바나 정규 2집 수록곡 'Come As You Are'로 보내드립니다. '꾸민 모습이 아닌 진실한 모습의 너를 원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죠. 노래에서 반복하는 "No I don't have a gun"이라는 가사는 뭔가 씁쓸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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